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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의 <민생고 희망찾기> 국회 토론회 “제화노동자들의 이야기”
최재천의 <민생고 희망찾기> 국회 토론회 “제화노동자들의 이야기”
  • 성동저널
  • 승인 2013.07.30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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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동저널] 제화노동자란 구두를 만드는 일을 하시는 분들이다. 법률적으로 표현하면, 임금(급여)을 목적으로 구두를 만드는 사업이나 사업장에서 근로를 제공하는 분들로서 내용적으로 볼 때, 근로기준법에서 정하는 근로자(즉, 임금노동자)임에 분명하신 분들이다.

그런데 이분들 고용구조가 1997년 이후 급격히 변동 악화되었다.
여전히 자신들은 임금(급여)을 목적으로 노동하지만, 더 이상 근로기준법상의 근로자로 인정받지 못한다. 사용자측이 자신들의 급여소득을 개인사업자의 소득으로 처리(3.3% 사업소득세 원천징수)하기 시작했고 사업자등록증을 가지고 있어야만 근로를 제공할 수 있게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서울 구두업체의 40%가 밀집되어 있는 성수동 지역에서 임금(급여)을 목적으로 구두 생산에 종사하는 6000여명의 근로자들 대다수가 어느 날 갑자기 자영업자가 되어 버린 것이다.

최재천(민주당, 서울 성동갑)의 민생고 희망 찾기 국회토론회 제9주제 “제화노동자들의 이야기”는 이와 같이 한국제화산업의 특수성과 전 산업에서의 고용구조 악화라는 일반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제화노동자들의 처한 현실을 점검하고 그 합리적 해결방안은 무엇인가에 대해 토론하는 자리이다.

토론회는 지난 2013년 7월 25일 오후 5~7시, 국회 의원회관 신관 2층 제1세미나실에서 열렸다. 이번 토론회는 경향신문사, 오마이뉴스가 후원하였으며, 최재천 의원실, 경향시민대학, 경제민주화국민본부가 공동주최했다.

토론회에서는 40년 넘게 제화노동을 하고 있는 박석규씨의 당사자 사례발표와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 정기만 서울일반노조 제화지부장의 사례발표가 있었다. 이어서 이동준 한국제화아카데미 사무국장이 “제화노동자들의 현황과 법제도 개선과제”를 주제로 토론 발제를 하고, 임무송 고용노동부 근로개선정책관(국장)님과 김기덕 노동법률원 새날 변호사 등이 토론했다.

<민생고 희망 찾기>는 최재천 의원실과 경향시민대학이 공동으로 사회적 약자 등 한국 사회 취약계층들의 목소리를 듣는 자리를 마련, 특히 이들과 관련 연구자 등 전문가, 담당 공무원과의 만남을 통해 정책수요자들의 정책요구에 응답함으로써 진정한 서민대책, 민생해결을 위한 대안을 만들고자 하는 자리였다. 그동안 “청년 불완전 취업, 그 절망과 희망”(1주제), “대부업 시장으로 내몰렸던 사람들, 그 과거와 현재”(2주제), “콜트ㆍ콜텍 노동자들의 이야기”(3주제), “합정역 홈플러스 입점 저지를 위한 아름다운 동행? 부제: 대형마트, 기업형 슈퍼마켓 규제 충분한가?”(4주제), “대안은행을 말하다! - 부제: 국내 마이크로 크레딧의 현황과 과제”(5주제), “재능교육지부의 아픔, 내가 왜?”(6주제), “서울생활 행복도우미, 다산콜센터의 노동실태”(7주제), “케이블 방송 하도급 구조와 하청노동자 실태”(8주제)에 대해서 토론했다.



최재천의 민생고 희망찾기 국회토론회 “제화노동자들의 이야기” 사례발표문

"일하다 다쳐도 하소연 할 곳 없는 제화노동자의 삶"

제화노동자 박석규

구두를 만드는 일을 시작한지도 벌써 올 해로 40년이 넘어갑니다. 아들과 대학 졸업 후 미취업 상태의 딸을 둔 가장으로서 일을 놓을 수도 없이 오로지 구두를 만드는 길을 걸어 갈 뿐입니다.

구두를 만들어 가는 길에서 지금까지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요즘처럼 힘들 때가 없군요. 구두 한 켤레에 얼마간의 돈을 받는 소위 개수임금제로 인해 같이 일하는 동료 노동자들과 얘기할 시간도 그리 많지 않고, 점심시간에는 밥을 5분 만에 후딱 해치우고 자리로 돌아가 한 개라도 빨리 구두를 만들어야 돈이 된답니다. 성수기에는 건강은 생각지도 못하고 하루 17시간 이상씩 일을 해야 하고 비수기에는 일감이 없어 일찍 퇴근할 수는 있지만 그나마 6개월도 안 되는 성수기에 일을 반짝해 놓지 않으면 일 년간 살아갈 길이 막막해집니다.

이런 저의 모습을 보고 딸내미는 안타까운지 그일 그만두고 장사라도 하자고 채근합니다.

그래도 한때는 잘 나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70년 말에서 90년 초까지는 양화점에서 일하면서 지금보다는 여유롭게 생활하고 몇 년간 사업도 해 봤습니다. 동료 간에 우애도 있었구요....

73년에 충북 음성에서 다른 사람들도 그렇듯이 먹고 살기 힘들어서 14살의 어린 나이로 하견습 구두일에 뛰어 들었습니다. 그때는 구두 만드는 기술만 제대로 배우면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다는 말에 어린 나이로 뛰어 들었습니다. 하견습에서 선생(당시 구두공 노동자는 상중하 견습 그리고 기술자로 인정받는 선생까지의 단계를 밟아 나감)까지는 보통 4~5년이 걸립니다. 견습 시절에는 지금과는 달리 창과 중창을 직접 깍으면서 바닥일(저부공정)을 했습니다. 처음 들어가서는 양화점에서 월급으로 임금을 받았는데 어리고 기술이 없어 많은 돈은 아니었지만 기술을 배운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러다 77년에 서울로 올라와 성수동에 있는 양화점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충북 음성과는 달리 서울에서는 양화점인데도 불구하고 도급의 형태로 개수임금제를 실시하여 개당 얼마씩의 임금을 지급하더군요. 염천교쪽에서는 영세한 양화점을 중심으로 사업자등록증이나 3.3% 사업소득세1)를 지급하면서 노동자를 사장으로 만드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그래도 당시에는 지금과는 달리 구두 한 개당 단가가 지금 기준보다는 높았기에 생활하기에 그리 나쁜 편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면서 용두동, 염천교, 중간에 미아리에서 자영업도 하면서 구두 만드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다 97년 IMF이후에 구두 업체들이 성수동으로 모여 들면서 자연스럽게 99년에 미소페, 엘칸토 하청, 무크 등의 공장에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성수동에서는 97년 이전과는 달리 고용형태가 달라지면서 일의 강도가 더욱 강해지고 개수임금제에 의한 임금에 있어서도 물가는 올라가는데 임금은 제자리 걸음을 하는 경우가 생기기 시작하더군요.

염천교 몇몇 군데에서나 실시하던 노동자가 사업자등록증 발행이나 3.3%사업소득세 지급문제가 핵심 공정인 저부, 갑피 담당 노동자 전반으로 퍼지게 되었고, 그로 인해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한 저희들은 4대보험에 가입되지 못함으로 인하여 노후설계나 건강 검진등을 받지 못하는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특히나 저 같은 경우는 2012년 상반기에 좁은 공간에서 작업하는 도중 기계에 눌려 손가락의 뼈가 보일정도로 큰 부상을 입었지만 3.3% 사업소득세를 지급한다는 이유로 산업재해로 인정받지 못하고 개인 돈으로 병원비를 지급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사측에서는 처음에 100만원의 치료비만 부담하겠다는 말도 안 되는 금액을 제시했고 이후 노동조합과 같이 싸운 끝에 700만원의 사측 치료비를 부담하는 선에서 끝났습니다마는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함으로 인하여 산재보험을 받지 못해 업주와는 얼굴을 붉히고, 당시 일을 나가기 전까지 생활상의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현재 성수동에서는 구두를 만드는 노동자들로서 여러 문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사업자등록증이나 3.3%문제로 인하여 노동자성을 인정받지 못해 일하는 도중 다쳐도 어디 가서 하소연도 못하고 있습니다. 또한 도급에 의한 개수임금제는 같이 일하는 동료와의 인정을 끊고, 오로지 구두만 만드는 기계로 전락시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빨리 개선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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